나는 마라톤으로 화해한다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온 베테랑 러너의 고백!

처음 마라톤을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직장 생활에 지쳐 우울감에 휩싸여 있던 어느 가을 오후였다.
단순한 운동이 필요해서, 혹은 몸무게를 조금 줄여보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 근처 공원에서 조깅을 시작했다.
그게 이렇게 긴 여정이 될 줄은 몰랐다.

지금 나는 10km 단거리부터 울트라마라톤까지 총 42회 완주했고,
그 중 20회를 풀코스로 뛰었다.
하지만 이런 경력 뒤에도, 매번 느끼는 건 같다.
마라톤은 싸움이 아니라 화해다.
자신의 몸과, 통증과, 고통과, 마음속 깊은 고집과 화해하는 과정이다.

나는 마라톤으로 화해한다



허리 통증 – 강한 코어 없이는 1km도 못 간다

나 역시 초보 시절엔 무작정 많이 뛰는 것이 실력이라고 생각했다.
러닝화만 신고 길로 나가 수십 킬로미터를 달리다 허리가 망가졌고,
어느 순간 앉거나 일어설 때마다 찌릿한 통증이 찾아왔다.
MRI 결과는 요추부 염좌와 디스크 초기.

그제야 깨달았다.
마라톤은 다리만 움직이는 운동이 아니라,
척추를 중심으로 한 몸 전체의 균형 운동이라는 것을.
이후 나는 러닝 외에도 필라테스와 코어 근력 운동을 병행했고,
지금까지 부상 없이 장거리 레이스를 계속 뛸 수 있는 체력을 유지하고 있다.

러너에게 허리는 ‘기둥’이다.
기둥이 흔들리면 아무리 다리가 빠르고 근육이 단단해도 소용없다.
허리 통증은, 몸이 보내는 가장 정직한 경고다.
그 경고를 무시한 채 훈련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발바닥 물집 – 작은 고통이 만드는 큰 차이

물집 하나가 레이스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두 번째 하프마라톤에서 배웠다.
그날은 비가 왔고, 양말이 젖은 상태에서 15km를 달리다
발가락과 발바닥에 물집이 터지면서 극심한 통증이 시작됐다.
그 후 6km는 거의 절뚝이며 걷다시피 들어왔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발 관리에 집착하다시피 한다.
러닝 양말은 반드시 기능성으로, 발볼과 뒤꿈치를 꽉 잡아주는 구조로 선택하고,
신발은 쿠션과 반발력 외에도 내 발의 생김새에 꼭 맞는지를 기준으로 삼는다.
레이스 전날엔 발톱을 정리하고,
각질을 제거해 물집 발생을 최대한 줄인다.

그 작은 물집은 러너에게
몸의 밸런스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알람이다.
경험으로 안다.
아픈 쪽을 피하려다 다른 부위에 과부하가 오고,
그게 또 다른 부상을 만든다.


숨가쁨과 체력 저하 – 리듬은 속도가 아니라 호흡에서 시작된다

많은 초보 러너들이 ‘빨리 달리는 법’을 묻는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오래 달리는 법’, 그 안에 포함된 호흡의 기술이다.

장거리 주행 중 가장 무서운 적은 호흡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숨이 거칠어지고 리듬이 깨지면 심박수는 급격히 상승하고,
근육보다 먼저 ‘의지’가 무너진다.

나는 대회 전엔 반드시 호흡 훈련을 병행한다.
복식호흡, 정지호흡, 러닝 중 호흡 수 조절 등
나만의 루틴이 있다.
특히 풀코스 이상 레이스에선 5km마다 물과 에너지를 섭취하며
호흡과 페이스를 ‘초기화’시킨다.

체력이 부족할 때는 그냥 달리기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호흡을 정리하고 나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마라톤은 결국 리듬의 스포츠다.
꾸준한 리듬을 유지하는 자만이 결승선을 넘을 수 있다.


‘나는 왜 달리는가?’의 수백 가지 답

마라톤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이거다.
“그 고생을 왜 해요?”
사실 나도 처음엔 그 질문에 대답을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마라톤은 내게 회복의 의식이다.
회사 일로 마음이 다쳤을 때, 가족 문제로 무너졌을 때,
몸이 망가졌을 때도,
나는 도로 위를 뛰며 내 자신과 대화를 했다.

거울을 보며 하는 독백은 공허하지만,
1km, 5km, 30km를 뛰면서 묵묵히 생각을 정리할 때
진짜 속마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괜찮아, 넌 잘하고 있어.”
“오늘은 여기까지가 최선이야.”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잖아.”

마라톤은 기록의 스포츠 같지만,
실제로는 용서의 스포츠다.
나 자신을 용서하고,
지난 실패를 용서하고,
오늘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다시 내일을 준비하는 스포츠다.


결론 – 마라톤으로 나는 나를 다시 사랑하게 됐다

허리 통증, 발바닥 물집, 숨이 가쁜 순간들,
포기하고 싶은 새벽, 무너지는 체력,
모든 걸 경험했다.
그것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나는 이제 마라톤으로 싸우지 않는다.
마라톤과 화해하며, 내 몸과도 화해하고 있다.
그리고 매년 수만 명의 러너들이
이 길 위에서 자신과 손을 잡고 달린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새벽 5시에 알람을 맞춘다.
누군가에겐 미친 짓일지 몰라도,
나에겐 그것이 자신과 맺은 가장 진실한 약속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