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한 줄만 알았는데... 악성 빈혈이었어요" - 50대 주부의 경험담

– 교통사고 외상 환자의 생생한 기억
사실 그날은 정말 평범한 화요일 저녁이었어요. 회사에서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저녁 반찬으로 뭘 먹을까 생각하면서 운전대를 잡고 있었죠.
비가 조금씩 내리던 흐린 날, 교차로 신호가 노란불로 바뀌는 걸 보고 속도를 살짝 올려 지나가려는데, 맞은편에서 좌회전을 강하게 들어온 차가 정면으로 박아버렸어요.
'쿵' 소리와 함께 세상이 뒤집힌 것 같았어요. 에어백이 터졌고, 머리는 핑 돌았고, 다리는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죠.
차가 옆으로 밀리며 가로등에 부딪힌 뒤에야 멈췄어요. 창밖에서 사람들이 뛰어오더라고요.
누군가 "119 불렀어요!"라고 소리치는 게 들렸고, 저는 그때부터 기억이 조금씩 흐려졌어요.
구급차 안에서 저는 거의 정신을 잃을 듯 말 듯한 상태였고, 병원 도착과 동시에 응급실로 바로 이송됐습니다.
그때 처음 봤어요. 정말 응급실이란 곳이 ‘전쟁터’라는 말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의사들, 간호사들, 레지던트, 응급구조사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저 하나 살리겠다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어요.
"이름 들리세요?"
"과거 병력 있습니까?"
"다리 고정해요, CT 바로 갑니다!"
그 복잡하고 긴박한 말들 속에서, 단 한 명의 간호사가 제 손을 잡고 말하더라고요.
"괜찮아요. 우리가 살릴 거예요."
그 말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의사 선생님 말로는 왼쪽 대퇴골이 부러졌고, 이마에는 큰 열상, 갈비뼈도 금이 갔다고 했어요.
다리 고정을 위해서는 응급 수술이 필요했고, 출혈도 심했기에 빠르게 수혈이 시작됐죠.
CT와 X-ray는 말할 것도 없고, 심장과 폐 상태 확인도 동시에 진행됐어요.
제가 서명도 제대로 못하니까, 보호자 없이 동의 가능한 긴급수술 서류로 들어갔고, 수술실로 옮겨졌어요.
마취 전에 마주친 외과 선생님 눈빛은 정말 믿음직스러웠어요.
"우리가 책임지고 수술 잘 마칠게요."
그 말 한 마디가 전부였습니다.
수술 후 처음 깬 건 다음 날 새벽이었어요.
머리맡엔 간호사 선생님이 있었고, 말없이 링거를 교체하더니 웃으면서 말씀하셨죠.
"수술 잘 끝났어요. 이젠 회복하셔야죠."
그 순간, 제 눈에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아, 내가 살았구나.
통증도 통증이었지만, 살아있다는 게 너무 실감났어요.
그리고 곧 시작될 물리치료와 재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느껴졌죠.
중증외상환자라는 건, 단순히 치료받는 걸로 끝나지 않아요.
앉는 연습, 서는 연습, 다시 걷는 연습… 하나하나 다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해요.
특히 부러진 대퇴골 쪽은 재활치료가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근육이 다 굳어버렸고, 조금만 움직여도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어요.
하지만 병실마다 회진 돌던 선생님들이
"조금씩만 나아가면 돼요. 하루 1cm라도 앞으로 나가면 성공입니다."
라고 말해주실 때마다 다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어요.
제가 지낸 병원의 중증외상센터는 정말 ‘사람을 살리는 최전선’ 그 자체였어요.
처음 만난 응급구조사부터 수술을 집도한 외과의사, 물리치료사, 심지어 야간청소 도우미 이모님까지…
그곳에서 만난 모든 분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정말 묵묵히, 하지만 강하게 저를 살려주고 있었어요.
사고가 난 지 벌써 1년이 넘었어요.
이젠 절뚝이지도 않고, 천천히나마 혼자 걸을 수 있어요.
가끔 계단을 올라갈 땐 아직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그때 그 응급실을, 그 중증외상센터를,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을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이 뜨거워져요.
“의사는 생명을 다루고, 환자는 삶을 버텨낸다.”
이 말이 딱 맞아요.
저는 운 좋게 살아남았고, 그 안에서 엄청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혹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꼭 말해주고 싶어요.
"괜찮아요. 당신도 살 수 있어요."
그날 저를 살려준 간호사님의 말을, 이제는 제가 전하고 싶네요.